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문단 편집) === 덴마크 위기 === 1849년 독일 혁명 시기 [[덴마크]]에서는 [[동군연합]] 관계에 있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 홀슈타인 내 라우엔부르크 공국 포함.]을 완전히 합병하려 했는데, 홀슈타인 공국은 [[독일 연방]] 소속이었고 슐레스비히 공국 또한 독일계 주민이 상당수였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는 민족감정이 폭발하면서 연방 내 두 강대국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게 군사적 대응을 촉구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아직 혁명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자국내 민족주의자들이 또 한 번 폭발할 것을 우려해 내키지는 않지만 덴마크에 무력 대응을 시도했는데 [[대영제국|영국]]과 [[러시아 제국|러시아]]에서 크게 반발하며 나섰다. 결국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덴마크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중재를 받아 후퇴하는데 민족감정이 일어난 국면이라 '''외국 군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는 동포들을 저버렸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사실 독일 연방군의 전력은 소국에 불과한 덴마크의 군대를 몰아내기엔 충분한 전력이었고 실제로 약체인 [[덴마크군]]을 쉽게 격파했으나 영국과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로 알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선 함대를 보내 북해에 해상에서 무력시위를 했고 러시아도 [[빈 체제]]에서 채택한 군주 주권을 침해하는 국경 변경에 부정적이었다. 1차 덴마크 위기는 1848년 혁명이 거의 진압되고 영국과 러시아의 압력으로 현 상황 유지라는 조건 하에 흐지부지 넘어갔다. 1864년 2차 덴마크 위기는 15년전 덴마크 왕실의 상속문제가 겹쳐 또 한 번 폭발했는데 이번에는 영국과 러시아의 공조국면이 파토났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15년 전 러시아와 영국은 한 목소리로 '합법적 군주 주권을 침해하는 군사적 도발을 질타' 했는데 유럽 양대 강국은 [[크림 전쟁]]으로 사이가 크게 멀어진 데다 영국은 크림 전쟁으로 군비와 피해가 누적된 상태라 무력대응을 꺼렸고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에 이를 가는데다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친러 정책을 펴면서 대폴란드 정책에 협조하는 것에 매우 반가워했다. 따라서 비밀리에 크림 전쟁 패배 후 비무장으로 결정된 [[흑해]] 지역에 대한 재무장을 프로이센이 찬성하는지를 떠보았고 프로이센과 비스마르크는 묵시적으로 동의하면서 러시아를 기쁘게(?) 했기 때문이다.[* 흑해 비무장 파기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털 때 프로이센과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의 동의를 얻어 파기했다. 프랑스는 전쟁 중에 털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영국과 [[오스만 제국]]은 내부적으론 반발했지만 침묵을 지켰다.] 또 한 번 민족감정이 들끓어올라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독일 연방 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합병하라며 국민적 감정이 일어났다. 사실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은 덴마크 왕실의 상속문제는 전혀 알 바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자발적 애국운동이 혁명 분위기로 번져나가는 것을 경계한 데다 독일 연방 내에서도 덴마크 국왕이 독일 연방에 속한 홀슈타인 공국을 멋대로 덴마크령으로 합병하는 것은 불법적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명분상 외국에다가 "'''국민적 열망에 따라''' 어쩔 수 없는데요." 하면서 덴마크를 털기 시작했는데 오스트리아는 이를 계기로 독일 연방 의장국으로 독일 연방 내의 영향권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고 프로이센은 자국의 영토와 가까운 북해 연안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결국 1864년 10월 빈 평화 협정으로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공국(라우엔부르크 공국 포함)을 포기했고, 그 후 1865년 8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양국은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가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하기로 하는 가슈타인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를 분할했다. '''그러나 가슈타인 협정은 하루도 지켜지지 않았다.''' 일각에선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부터 이미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준비한 대규모 떡밥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훗날 비스마르크 본인이 "그게 다 나의 계획대로였지 ㅋㅋ" 이라고 자랑한 것이라 곧이 곧대로 믿긴 어렵다. 비스마르크가 모든 걸 설계했다면 1862년에 맞춰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7세]]가 기적적으로 그 시기에 죽고 새로 덴마크 왕이 된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인 [[글뤽스부르크 왕조|글뤽스부르크 가문]]이 홀슈타인 공국을 독일 연방에서 분리하여 덴마크에 합치고 또 다른 방계 가문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이하 아우구스텐부르크)이 글뤽스부르크 가문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과 덴마크 왕위를 모두 계승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황을 미리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을 통치권을 얻진 못했지만 프로이센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타협했다. [[빌헬름 2세]]의 황후가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의 장녀이며 공작은 보불전쟁때 프로이센 군영에서 종사했다.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가는 덴마크 왕실의 일원이기 때문에 통치가문으로 동등결혼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1848년 당시 혁명과 헝가리 반란 진압, [[이탈리아 통일|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와의 전쟁]]으로 국력 소모가 컸고 군대는 투자는커녕 이전 수준으로 회복도 되지 않았으며[* 실제로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러시아 [[니콜라이 1세]]가 11만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면 진압이 불가능했다.] 재정은 파탄 상태였다. 더구나 도나우 강변은 라인 강 지역과 달리 후진적인 농업지대라 북독일 산업지역을 바탕으로 공업력이 일취월장한 프로이센의 성장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 인구는 오스트리아가 많았지만 제국에서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게 쳐줘야 1/4에 불과했고 독일 연방 지역에 속하지 않은 제국의 많은 지역은 독일 연방 내 오스트리아의 전쟁에 대해서 비협조적이라 과세와 군대 동원에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갈등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고 프로이센과 비스마르크는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가슈타인 협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두 공국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공동관리구역에서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관리 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 공국 내 라우엔부르크 공국에 대해서 250만 덴마크 탈러를 받고 프로이센에 영토를 팔아 버렸다. 그리고 홀슈타인 공국내 [[킬(독일)|킬]](Kiel) 항구를 프로이센 해군에 조차하여 독일 연방 소속 해군함대 기지로 하고 슐레스비히와 프로이센을 잇는 군사도로 2개와 킬 군항 접근 도로 부설권한마저 프로이센에 허가했다. 비스마르크는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취약함을 눈치챘다. [[빈(오스트리아)|빈]](Wien)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관리하기는 전혀 불가능한데다가 이미 홀슈타인 주둔 병력의 유지비조차 버거워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가 허덕였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처음에 전혀 고려하지도 않던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의 홀슈타인 공국 통치권 떡밥을 흘리고 슐레스비히마저 독일 연방에 가입하면 좋지 아니하냐며 독일 연방국들에게 언플을 해 댔다. 문제는 홀슈타인은 원래 독일 연방 소속이었으나 슐레스비히는 남부에 독일계가 상당하나 독일 연방 구성원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프로이센은 이 점을 꼬투리 잡아 독일 연방의회에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연방 개편안을 제출했고 이에 자극받은 오스트리아가 1866년 [[6월 17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고 몇몇 군소 제후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독일 연방 국가들이 오스트리아에 가담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